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안 현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수령으로 제임할 때 많은 치적을 남겼고 의성에 근무할 때 ‘장대서원’을 세워 지방고을 자제의 교육에 힘썼다.
이 건물은 아주 신씨의 종가인 낙선당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사당은 10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4각으로 두른 흙담장 중앙에 정남향을 향하고 있으며, 종택의 중심건물인 낙선당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신시제(1562∼1624)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신한(申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신응규(申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신몽득(申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박민수(朴敏樹)의 딸이다.
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 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신지제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